민족역사
한민족의 자기비판과 자기발견
기사입력: 2012/07/01 [23:47] ⓒ ontoda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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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적 의장의 大天命<54> 통일론 - 직관과 이론
제 4장 과제편 - 한민족과 세계모순의 집약화(5-4)
 
김선적
한국전쟁을 계기로 한 국제세력 추이의 외적 면에 대해서 내적 면으로는 한민족의 자기반성과 자기비판이 진행하여 한민족의 자기발견으로 차츰 각성하는 저류가 흐르기 시작하였다.


한민족의 자기비판은 제 1차적으로 남·북 정권에 대한 비판으로 표현되었다. 동족상잔의 무력통일을 실제로 일으킨 북한정권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이승만 대통령이 영도하는 남한정권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고 평화통일을 정강으로 하여 1958년 5·2 총선거에 신진세력으로 민족사회주의적인 경향의 진보당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일본에 있는 김삼규 씨 등은 자유로운 입장에서 ① 민주, 민족자결, 국제평화의 원칙에 입각하여 세계 각국의 협력으로 한국을 중립화하고 미·소의 군사기지를 반대하고 ② 통일한국의 정권은 현존하는 남·북 정권의 야합이 아니라 양 정권을 완전히 해체하여 새로 조직하고 ③ 선거관리는 제3자로 자타 공인하는 중립국을 UN이 임명하는 경우를 예상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제3세력이 차츰 대두하기까지 민족의 반성은 광범위에 걸쳐 전진되었음으로 1960년 3·15선거에 있어서는 이승만정권은 무리를 하지 않는 한 재선가망이 희박하게 되자 관권을 부정행사하는 부정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여기에 누적되어진 국민의 불만은 학생을 선두로 하여 폭발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4월혁명이다.
 
4월의 국민적 항쟁의 의의는 상당히 광범위한 이념이 집약화한 것이니, ‘이정권에 대한 불신임’의 내용은 다종다양한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자유당정권은 넘어지고 대 자유당 투쟁의 현역이었던 민주당이 현실적인 조직된 힘을 가진 정당으로 정권을 계승하게 되었던 것이다. 민족이념과 가치의 체계에서 이룬 세력이라기보다는 목전 공리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정당임이 정권쟁탈의 인사적 이유만으로 신·구 양파로 분열됨으로써 그 본질을 실증하게 되었으니 민주당이 집권하자 정치적 불안은 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이때 미국에 있는 한국문제연구소장인 김용중 씨는 1960년 10월초에 한국문제해결방안으로써 UN은 분할된 채 살 수 없는 한국을 통일시킬 의무가 있으며, 이 의무를 수행하려면 양대 진영은 다음과 같은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 제안하였다.

① 남한과 함께 북한에 대해서도 통일에 관한 각자의 견해를 표명하기 위하여 UN총회에 대표를 파견토록 초청한다.

② 양측의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군사정전위원단을 인도·버마·세이론·스웨덴·스위스와 같은 어느 세력권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국가들로 구성, 위원단을 교체한다.

③ 비무장지대를 각기 양쪽으로 20마일씩 확대시킨다.

④ 중립국감시단 아래 남북한을 통해 군대를 점진적으로 해산시킨다.

⑤ 비블록국가들로 구성된 중립국위원단 감시 아래 인구비례대표단에 의하여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자유선거를 통해 단일정부 아래 통일을 이루도록 돕는다.

⑥ 한국의 지리적 위치로 보아 한국이 정치적·군사적 및 경제적으로 엄정중립을 지키며 모든 나라에 우호적이고 어느 나라에도 추종치 않는다는 조건 아래 UN과 중립국은 한국의 독립, 주권 및 영토 보전을 보장해야 한다.

한편, 유력한 미 상원의원 마이크. 맨스필드의 극동보고서 중 건의 제6항에서 “우리는 쌍방간에 수락될 수 있는 한일문제의 해결을 제시하기 위하여 가능한 최대한도의 조정역할을 취해야 할 것이며, 더욱 한국 통일문제를 오스트리식 중립화의 조건으로 해결하는 가능성을 가장 신중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라고 할 만큼 전진하였던 것이다.

이때 국내에서는 자유당정권은 반공 북진통일을 국시라고 자기 주장하는 데서 이에 배치되는 세력은 권력에 의하여 말살하였던 것이다. 평화통일을 주장한 진보당의 조봉암(曺奉岩)을 합법적으로 제거하였으니 -민주당정권 때 재심에서 사후 무죄로 되었다 함- 외국추종세력 아니고는 현실적 활동이 강권으로 제지당하였던 까닭에 민족주의적 입장에 선 신세력들이 자랄 여지없이 통제, 감시되었던 까닭에 자유당 때는 보수정객만이 현역정객으로 간주되어 왔던 것이다.

이 같은 압력 아래에서도 4월혁명이 성공하게 되자 통칭 ‘혁신’이란 표명을 한 민족세력권에 해당하는 세력이 출현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인 실천방법이 정리되지 않고 세련되지 않은 넓은 폭을 가진 이 혁신세력이란 민족세력권으로 지향하는 군소의 경향은 상당한 혼란이 있을 것이 예상되었다. 그러한 예상을 가지고 그 대책을 세우기 위해 혁신세력의 중견들에 의해,

① 혁신세력의 단일연맹화로 총선거에 응한다.

② 단일선거공약으로써 대오를 일치시킨다.

③ 원내세력을 구성한 다음에 단일정당을 구성한다.

는 요지로써 혁신세력의 분열로 인한 총선 추진의 혼선을 방지하고자 혁신연맹(가칭)이 발기되었다.
 
그러나 동년 5월 7일 태고사에서의 결성대회를 계엄사에서 해산시킴과 아울러, 안으로는 일부에서 사회대중당을 발기할 것을 선언하게 된다. 이 분열에서 선거전에 혼선을 가져옴은 물론 종파적 행동으로 군소정당이 생기고 서로의 융화를 해치고 중상하는 혼전으로 부동하게 되는 현상을 저지르게 되었던 것이다. 4월 19일부터 7월 29일까지 만 1백일에 불과한 시간적 제약이 컸고 경제적 여건이 없는 데다가 조직력의 분산과 혼선은 원내의석이 불과 수석에 그치는 참패를 가져왔던 것이다.

이러한 참패로 교섭단체 하나도 이루지 못한 이들은 선거 후 정비에 착수하려 하였으나 선거기간중에 이미 불신의 장벽이 조성되었고 이것을 해소시킬만한 계기가 박약하여 몇 갈래로 나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자체의 인적·사상적 미정비와 실천의 차질은 식자와 일반대중의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런 내부의 소란 속에 민족주의 진영을 대변할 것을 기도하며 「민족일보」가 나왔으나 혁신정당의 자기정비의 결여성은 민족일보의 논조가 많은 의문을 받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정비되지 못한 민족세력권 진영 내에는 가장된 회색주의와 중간주의세력의 추종적인 이질분자들이 편승하게끔 되었다. 이로 인하여 혼란은 가중되었고 민족주체적 세력의 분열은 이런 이질분자에 의해 분열되고 혼란된 것이라 함이 이유 있는 논리일 것이다.

이러한 진통을 겪는 가운데 그들의 이념은 민족주의·민주사회주의 또는 사회적 민주주으로 표현되었다. 민족통일추진세력으로 자부한 그들은 통일방안은 연구의 과제로만 하고 통일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이 급선무라 하는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와, 확고한 통일방안이 없는 통일의식의 고취는 민족을 혼란의 구렁으로 몰아넣는 것이며, 이는 민족통일에 도리어 유해한 혼란의 연장이 될 것이라는 비판적 입장에서 중립화통일운동총연맹으로 갈려 분립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미정리된 상태로 범민족주의 세력은 태동되고 또 번져갔던 것이다. 이런 상황 중에서 1960년 11월초에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 발기대회에서는 민족의식에 대한 거리낌 없는 실정을 표현한 대정부 및 사회 건의문이 채택되었던 것이다.

① 기성세대는 남북분단의 비극을 일으키게 한 도의적 책임을 통탄하고 민족통일에 대한 새 세대의 정당한 발언을 묵살 내지 억압할 자격이 없음을 시인하라.

② 남한의 모든 정당 및 사회단체는 패배의식을 철저히 불식하고 남북한 총선거에 대비하여 공산당과 대항하기 위하여 연합의 기틀을 마련하라.

③ 정부는 조국통일문제에 대하여 현실에 입각한 적극외교로 전환하라. 장 국무총리는 이러한 외교의 일환으로 한국통일문제만을 협의하기 위하여 미국과 소련을 특별방문하고 미·소지도자와 회담하라.

④ 세계인권선언 등에 의하여 보장된 인간의 기본적인 서신의 자유를 남북한에 하루바삐 시행하라.

이와 같은 민족의식이 저변에서부터 소생하게 되자 보수정부는 당황하게 되었고 곧 한국중립화론에 대한 배격하는 태도를 취했다. 1960년 2월 2일 장면 국무총리는 미국의 민주, 공화 양당 대통령후보자에게 전문을 발송하여 “전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대한민국정부는 중공의 흉계와 그들의 태도와 그들이 보여준 행동의 현실적인 평가에 입각하여 중립을 강경히 반대하는 바이다. 한국정부는 중립에 대한 여하한 제의도 지극히 위험한 것으로 그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체 자유세계에 처참한 결과를 가져올 중공의 침략을 초래하는 것이라고 사료하는 바이다.” 하였던 것이다.

민족주체세력의 확립을 위한 입장에 서는 혁신세력은 한둘의 예외는 있었으나 한국의 영세중립을 주장하게 되었고 가능한 한의 남북교류가 주장되었다. 보수정당인 민주당과 신민당-신구 양파의 민주당이 분립한-은 중립 통일화를 반대하였고 남북교류를 반대한 입장에서 논쟁은 데모로 이어지는 사태를 일으켰고 사회적 불안이 조성되어 갔다.

이렇게 됨에 자유당에 의한 보수적 분위기에서 십여년을 거쳐 보수성 일색이었던 사회의 타성은 보수적 강경론자들에 의한 혁신세력의 민족주의적 기조에 대해서 이해와 관용보다는 혁신세력을 용공세력 또는 중간회색세력으로 규정하고 그 소탕을 의도하는 데 묵묵하게 되었다. 또 한 면에 있어서는 혁신세력자체의 철저한 자가비판과 정비가 진행되지 않으면 민족사태 수습의 주체세력이 될 수 없다는 점을 통절히 반성하고 그 대책을 설득 진행함에 필자는 참여하였다.  [암만 김선적 桓國委員會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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